포르투갈 인판타 마리아 아나 (184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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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의 인판타 마리아 아나(1843년 8월 21일 ~ 1884년 2월 5일)는 포르투갈의 마리아 2세 여왕과 페르난두 2세의 딸이다. 1859년 작센의 게오르크 왕자와 결혼하여 8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남편은 1902년 작센 왕국의 국왕이 되었다. 마리아 아나는 작센의 왕비가 되기 전인 1884년에 사망했으며, 그녀의 장남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3세가 1904년 작센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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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843년 8월 21일 포르투갈의 마리아 2세 여왕과 그의 남편 페르난두 2세의 차녀로 태어났다. 언니 마리아가 1840년에 태어나자마자 사망했기 때문에 사실상 장녀였다. 1853년 어머니 마리아 2세가 사망했고, 1858년 오빠 페드루 5세가 슈테파니 폰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과 결혼하면서 마리아 아나도 결혼을 준비했다.
1859년 5월 11일 작센 왕국의 베틴 가문 출신 왕족 게오르크 왕자와 결혼했다. 남편 게오르크는 1902년 작센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했지만, 마리아 아나는 작센 왕비로 즉위하기 전인 1884년 2월 5일 사망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8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남편은 차남이었기 때문에 왕위가 바로 돌아올 것으로 예상되지는 않았지만, 형 알브레히트와 왕비 카롤라 사이에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1902년 게오르크가 왕위에 올랐다. 1904년에는 장남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가 왕위를 계승했다.
2. 1. 포르투갈 왕녀 시절
1843년 8월 21일 포르투갈의 마리아 2세 여왕과 그의 남편 페르난두 2세의 차녀로 태어났다. 언니 마리아가 1840년에 태어나자마자 사망했기 때문에 사실상 장녀였다. 1853년 어머니 마리아 2세가 사망했고, 1858년 오빠 페드루 5세가 슈테파니 폰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과 결혼하면서 마리아 아나도 결혼을 준비했다.[2]1859년 5월 11일 작센 왕국의 베틴 가문 출신 왕족 게오르크 왕자와 결혼했다. 남편 게오르크는 1902년 작센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했지만, 마리아 아나는 작센 왕비로 즉위하기 전인 1884년 2월 5일 사망했다.
마리아 아나는 열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1858년 5월 맏오빠 포르투갈 국왕 페드루 5세가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의 스테파니 공주와 결혼할 때까지 궁정의 안주인 역할을 했다. 초기에 두 시누이는 좋은 관계였으나, 스테파니가 사망한 1859년 앨버트 공에게 보낸 편지에서 페드루 국왕은 누이 마리아 아나가 아내 스테파니에 대해 "''낮은 지위에서 비롯된 여성적인 허영심 때문에 (...)''" 불쾌한 말을 했다고 언급했다.[3]
두 시누이의 관계는 1858년 5월 스테파니가 도착하고 1859년 5월 마리아 아나가 결혼한 이후 기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스테파니는 시누이 마리아 아나에 대해 "''그녀는 모든 면에서 페드루를 가장 닮았다(...)''", "''매력적이고, 착하고, 관대하며, 나이에 비해 현명하고, 이기심이 전혀 없으며, 우리 모두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다'' (...) ''작센의 게오르크는 진정한 보석을 발견했다. 그녀는 행복하고 그를 사랑하지만, 가족을 떠나는 순간에 대해 울지 않고는 말할 수 없다. 확실한 것은 그녀가 끔찍한 공백을 남길 것이라는 것이다''"라고 썼다. 마리아 아나의 오빠 페드루는 이 시기 앨버트 공에게 보낸 편지에서 누이가 "''우리 가족의 진주''"라고 말하기도 했다.
포르투갈 여왕 마리아 2세와 왕배페르난두 2세의 딸로 리스본에서 태어났다.
1859년 5월 11일 벨렘 궁전에서 작센 왕 요한의 차남 게오르크와 결혼했다.
2. 2. 작센 왕자와의 결혼
1859년 5월 11일, 마리아 아나는 작센 왕국의 베틴 가문 출신 왕족 게오르크 왕자와 벨렘 궁전에서 결혼하였다. 게오르크는 요한 1세의 차남이자, 마리아 아나의 아버지 페르난두 2세와 같은 베틴 왕조의 가톨릭 알베르틴 분가 출신이었다.[1]결혼식은 화려하게 치러질 예정이었으나, 실제로는 조용하게 진행되어 포르투갈과 작센 양국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1] 신혼부부는 벨렘 궁전에서 결혼 후 첫 며칠을 보냈는데, 게오르크 왕자는 "신부와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초청받은 연극 공연에도 참석하지 않아 포르투갈 왕실에 좋지 않은 인상을 남겼다.[1] 당시 15세였던 마리아 아나는 공연 도중 우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1]
- -|]]|thumb|left|마리아 아나 공주와 그녀의 어린 딸, 작센의 마리 요한나 공주]]
1859년 5월 14일, 부부는 작센으로 떠났다. 마리아 아나는 포르투갈 시녀를 데려갈 수 없었고, 오빠 루이스와 함께였다.[1] 페드루 5세는 이 결혼에 대해 "내 여동생과 작센의 게오르크 공자의 결혼은 행복보다 화려함으로 축하받았다. 전자는 후회스러운 운명을 따랐는데, 그는 공감을 얻지 못했고 그를 만난 사람들은 종종 좋지 않은 인상을 받았다."라고 평했다.[1]
역사가 에두아르도 노브레는 게오르크 왕자가 "포르투갈 인판타의 기대와 자질에 미치지 못했다"며 이 결혼이 행복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부는 여덟 명의 자녀를 두었다.[2]
마리아 아나는 결혼 당시 포르투갈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지만, 남성 계통이 단절될 경우 여왕이 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3] 1861년, 페드루 5세와 다른 두 오빠가 장티푸스로 사망하고 자녀를 남기지 않아 이 가능성이 현실화될 뻔했으나, 루이스 1세가 사보이의 마리아 피아 공주와 결혼하여 카를루스 1세와 아폰수 왕자를 낳으면서 사라졌다.[3]
1883년경, 막내 아들 알베르트가 심각하게 병에 걸리자 마리아 아나는 몇 달 동안 그를 간호했다.[4] 그러나 이로 인해 1884년 2월 5일 과로로 사망하여, 남편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지 못했다.[4] 남편 게오르크는 남은 생애 동안 재혼하지 않았다.[4]
마리아 아나와 게오르크 사이에는 8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게오르크는 차남이었기 때문에 왕위 계승은 예상하기 어려웠지만, 그의 형 알브레히트와 왕비 카롤라 사이에 자녀가 없어 1902년 작센 왕위에 올랐다.[6] 1904년에는 장남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가 왕위를 계승했다.[6]
2. 3. 결혼 생활과 자녀

마리아 아나는 1859년 5월 11일 벨렘 궁전에서 작센의 게오르크와 결혼했다. 게오르크는 작센 왕 요한의 둘째 아들이었다. 이 결혼은 행복하지 않았지만, 둘 사이에는 8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마리아 아나는 1884년 2월 5일 과로로 사망했다. 그녀의 남편 게오르크는 1902년 작센 왕위에 올랐으며, 1904년 사망하자 장남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3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2. 4. 작센 왕위 계승
1859년 5월 11일, 벨렘 궁전에서 작센 왕 요한의 차남인 게오르크와 결혼했다. 게오르크는 차남이었기 때문에 왕위가 돌아올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지만, 그의 형 알브레히트와 왕비 카롤라 사이에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1902년에 게오르크가 즉위했다. 1904년에는 장남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가 왕위에 올랐다.3. 가계도
참조
[1]
간행물
Patrilineality
Almanach de Gotha
1944
[2]
서적
Rainhas Que o Povo Amou
Temas e Debates
2013
[3]
서적
Rainhas Que o Povo Amou
Temas e Debates
2013
[4]
서적
Rainhas Que o Povo Amou
Temas e Debates
2013
[5]
서적
Família Real - Álbum de Fotos
Quimera Editores
2002
[6]
서적
Família Real - Álbum de Fotos
Quimera Editores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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